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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진호프 - 우사단길 끝의 참되고 바른 레트로 치킨
    맛있는 것들 2020. 4. 15. 02:13

    레트로 느낌이 아니라 진정한 레트로의 이곳 미진호프. 27년 간 한 자리에 있었다.

    #미진호프 >

     

    도저히 이 감동을 지나칠 수 없어 장문의 기록으로 남기니 송구할 따름이다. 요새는 글이 길면 아무도 안 읽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티스토리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평소 나는 간판이 신기하면 이유불문 하고 들어가는 편인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을지로에 책 인쇄 맡기고 따릉이로 죽을 힘을 다해 달리다 보니 마음의 고향 이태원에 도착, 먹는 것에는 심히 보수적인 나는 오늘만큼은 살짝 왼쪽으로 걷기로 결심한다. 매번 가던 곳 대신 새로운 곳을 가는 것 말이다.

     

    그래서 우사단길에 들어섰다. 역시 참고가 안 되겠지만 참고로 이곳은 보광동 산 4번지인데 기우제, 기설제를 지내던 우사단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우사단 마을이었다나. 우사단은 1908년에 폐지됐다. (서울지명사전 참조) 이태원 역에서 5분 남짓 걸으면 이슬람 사원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직선으로 쭉 이어진 길이 우사단길이다.

     

    2013년~2015년의 피크가 지나고 많이 조용해진 느낌이다. 언제나 난리인 이태원 역과 직선거리로는 지척이나 교통이 쉽지 않아 마음의 거리는 많은 이들에게 멀어 보인다. 하지만 사람 사는 향기이며 색 짙은 가게들이 생각보다 존재감을 뽐내는 이곳 우사단길… 이라는 생각은 이제 와서 하는 거고 사실 너무 힘들어서 아무 생각 없이 길 저 끝의 도깨비 시장까지 걸었다가 근처의 ‘미진호프’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레트로 감성이 아니라 진짜 #레트로 다. (OB로고만 봐도 세월이 느껴진다) 게다가 이모님이 의도하신 것은 아니겠지만 입간판의 핑크색 덕에 왠지 나의 미래 너의 미래도 통합될 것 같지 않은가!?

     

    무가 정말 훌륭해서 큰일이었다. 다음 사람이 먹을 무까지 먹어버려서.

     

    …어쨌든 이유 없는 끌림에 이끌리기로 해보자. 단촐한 업장 내부엔 작은 테이블 서 넛만 있고 이모님이 홀로 계신다. 웬만한 동네 치킨집보다도 훨씬 작은 수준. 바로 카스 한 병 따고 생땅콩을 씹자니 ‘치킨무’가 나오는데 사실 이 무에서 끝났다. 무가 정말 맛있다. 미각이 둔한 나에게도 평소 먹던 치킨무와의 격차가 파도친다. 달달하니 신 게 아삭함을 뼈대로 고운 집을 지었다. 바로 무를 한 접시 다 비워내니 이모님이 직접 담근 거라고 하신다. 아니 담궜어도… 이런 맛이? 이모님… 당신은 대체…

     

    치킨은 주문 후 튀겨진다. 이미 허기는 성난 데모를 시작했지만 무 덕에 무혈 진압이다. 기다림은 문제가 안 된다. 드디어 나온 치킨도 역시 훌륭하다. 정직한 맛이다. 닭에 미리 밴 양념이 일절 없고 양념소스와 소금에 찍어 먹는 클래식 스타일이다. 사실 이쯤 되면 스타일은 중요치 않다.

     

     

    이미지를 설명해보라니... 지금 이 순간 새벽 2시 9분, 갓 튀긴 치킨의 고운 육질에 이성이 마비될 것 같다.


    이런 느낌이다. -> 여러 현란한 기술로 상대를 압도해오던 신진 무도가가 도장 깨기를 하던 중 인적 드문 야산의 도장에 들어선다. 낡디 낡은 샌드백과 그냥 쇳덩이인지 돌인지 구분도 안 되는 오래된 운동기구만 굴러다니는 마루 위에서 수염 무성한 시골뜨기 사범이 문하생 두 명에게 정권 지르기와 돌려차기만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무도가는 살짝 웃는다. ‘전혀 놀라울 게 없는 저런 정직한 공격에 당할 리 있나.’ 그러나 대련이 시작되자 마자 그 순수한 정권에 무릎을 꿇고 만다. 피할 겨를도 없었다.

     

    나만의 생각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봉준호 감독도 두 번이나 왔다고 한다. (이모님) 처음엔 일행들과 왔지만 그 다음엔 혼자 와서 한 마리를 다 드셨다는군. (이모님이 같이 찍은 폰카도 보여주심)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음이 틀림없다. 그 뿐 아니라 언제나 철저히 다이어트에 골몰하나 치맥에 관해서는 감별사 급인 동행자 ‘Min’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뒷통수만 보인다. 솔직히 맥주 안 마셨으면 1인 2닭 각이다. 글이 또 길어졌군… 하지만 다행히 나의 사회적 영향력이 너무나 미약하여 이렇게 쓴다고 사람이 많아져서 내가 다시는 못 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2년 뒤 재개발이라고 한다. 27년 간 한 자리에 있었다는 이곳은 어찌 될까. 그 전까지 기회 되는대로 가고 싶다. 다음에는 치킨+골뱅이 조합을 시켜 놓고 왜 가게 이름이 ‘미진’이냐고 여쭤봐야겠구만…

     

     

    손수 쓰신 메뉴판에서 이미 끝났다. 셋이 가서 1치킨에 골뱅이, 소맥까지 시키면 딱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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