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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치는 스웩 - 보라매 공원의 어르신들 이야기쓸모/없는 소리들 2020. 4. 25. 02:59
Swag1
평화로운 보라매 공원의 어느 날.
"아 거 요샌 진짜... 건강을 그대로 두기도 힘들어.. 무릎은 무릎대로고 성치가 않아 어이구"
70대 언저리는 되었을까. 때 탄 남색 모자(가운데에 Marine이라고 적혀있음)를 구겨 쓴 할배가 운동기구 옆 벤치에 앉아 허리를 두드린다. 주변엔 비슷한 연배의 할배들이 서넛 모여있고.
옆에 앉아있던 할배가 되묻는다.
"근디 저어-번에 자전거 탔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탄거여 그건??"
"어... 그 머시기... 뭐여 그기 있잖여. 아라뱃길인지 뭔지 정신 놓고 달리니까 90키로메타더라고.. 어이구"
그 때 였을까. Swag의 바람이 분 것은... 아라뱃길 할배 옆 다른 할배들의 미간엔 새로운 내 천(川)이 자리했음이 분명하다. 나도 턱걸이를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이것은...뭐라고 표현돼야 할까? 저 말이 끝나자마자 어딘가 숨어있던 디멘터들이 방청객의 환호마냥 뒤에서 "SwA.....g..."이라고 했어도 부족했을 정도의 서늘한 스웩의 바람일까. 그 바람이 할배들을 넘어 조금 더 멀리 있던 내 겨드랑이에까지 닿은 것일게다.
놀라움을 조금이나마 감추려는 듯이 다른 할배가 갸우뚱한다.
"아니.. 근데... 90km면.. 거 몇 리야? 10리가 4키로니께... 200리도 넘는데...!? 그걸 자전거로 갔어? 허어~ 거 참(도리도리)"
아라뱃길 할배의 표정을 못 봤지만 살짝 내려간 눈썹 밑에 비릿한 미소가 있었을 것은 나마저도 알 지경.
"헛헛... 좀.. 무릎이 성치 않아서 그렇지 원래는 더 많이 갔을것인디.. 허허..."
알 수 있다. 운동하려고 모인 할배들의 기류는 이제 심상치 않아졌음을. 나마저도 턱걸이 두 번째 세트를 시작할 타이밍을 놓쳤다. 역시 사람은 늙든 어리든 똑같다. 내가 철권5를 한창 하던 시절, 52연승을 했다고 겸손하게 얘기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SwaG...
겸손한 자랑. 혹은 자랑하지 않아도 상대의 뒷통수를 빡-하고 치는 충격. 그것이 스웩이라면 지금은 정확히 그것이다.
허리를 두드리며 저어만치 걸어가는 아라뱃길 할배... 당신은 이 보라매 공원에 또 어떤 스웩을 몰고 올 것인가...!
Swag2
턱걸이 세트를 다 마치고 헉헉대는데 바로 앞 할배 둘이 신나게 노가리를 깐다.
"어... 근디 저번에 그쪽이 몇 살이라고 얘기했던가?? 일흔??"
"어허... 거 무신...! 이제 여든이여 여든~!"
나이를 기억 못하는 할배가 당황한 척 둘러댄다.
"아니... 다아~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뭐! 그리고 요샌 얼굴만 봐선 나이를 어떻게 알어~ 자! 봐봐! 옆에 이 분 수염있으니까 나이를 도통 모르겠자녀! 여든인지 도통 몰랐어!!"
아... 지금 그게 나구나.
"하하.. 제가 수염이 좀 예 그렇죠 허허 ㅎㅎ"
"그렇다니까!!!"(으쓱)
조금 전부터 온 몸이 슬금허니 서늘한게 아 이제 알겠다. Swag의 바람이 훑고 지나갔음을. 그래. 저렇게 친해지는구나. 여든인 할배는 일흔이라고 들어서 분명 신나있다. '그래! 내가 앞자리는 팔이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고! 이 젊은 육 칠십대들 껄껄 경험의 빠-와를 보여줘잉? 어??'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떤 스웩이었을까. 겸손한 자랑과는 또 다르다. 감정의 찌꺼기 없이 상대를 세워줄 수 있는 주름의 스웩이었을까.
이제 저 둘은 지금부터 친구다. 해야 할 운동도 잊어버리고 둘만의 바다에 배 띄우고 노가리는 시작됐다.
평화로운 보라매 공원에 얼마나 큰 스웩의 폭풍이 또 몰아닥칠 것인지...!'쓸모 > 없는 소리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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