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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마구치 상... 당신은 어떤 남자였습니까. (빈티지 득템 후기)
    쓸모/가 분명 있는 것들(패션) 2020. 4. 23. 01:12

    화장실 셀카 오글오글 및 거울의 더러움 주의.

     

    2만원에 물건 하나 건졌다. 빈프라임에서 얻은 빈티지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이하 더블 재킷)

     

    최근 몇 년 간 빈티지 옷 시장의 초신성으로 떠오른 빈프라임... 특이하게도 강남에만(한강 이남) 매장이 있고 강북엔 없다. 강북에서는 전통의 강호 동묘 벼룩시장과 광장시장의 포스에 대적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아무튼 정확한 사유는 빈프라임 운영자만이 알 것이고 이곳의 남성복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하는 것 같다.

     

     

    명품(주로 랑방, 아르마니, 버버리, 가끔 구찌, 디올 등)재킷은 6~10만원대, 일반 브랜드 재킷은 죄다 2만원이다. 그런데 골 때리는 점은 2만원이나 10만원이나 대부분 일본인이 입던 옷이기 때문에 한국인에겐 사이즈가 애매한 경우가 많다는 것. 이걸 어찌 알 수 있을까? 안감을 보면 된다. 안감에 이니셜 혹은 한자 이름이 새겨진 재킷이 많은데 전부 일본인 누군가가 본인이 입으려고 맞춘 옷이다. (池田, 小林, 山口, 村川... 주로 두 음절의 한자이지만 정말 가끔 한 음절이나 세 음절의 한자 이름도 보인다) 그리고 랑방이나 아르마니도 안감을 보면 이니셜이 새겨진 재킷들이 꽤 있는데 이 역시 일본인이 그 브랜드에서 옷을 맞춘 것이다. 특히 명품 라인에는 80년대 중후반에 유행했던 파워숄더 + 더블 재킷 혹은 쓰리버튼 재킷이 많은데 버블 붕괴 직전 풍요로웠던 일본의 유산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량이 많다. (또 정말 가끔 특이하고 아름다운 켄조 재킷도 보이니 지속 센싱 필요)

     

     

    아무튼 이렇게 일본인이 맞췄던 재킷은 대부분 팔 기장이 짧다. 혹은 팔 기장이 맞으면 품이 크다. 나는 팔이 굉장히 긴 편이라 요새 국산 브랜드도 잘 안 맞는 아픔 덕에 빈프라임을 외면하고 있었다. "어차피 살 옷도 없는데 가서 뭐해?"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그 영롱한 자태는 어디가지 않았다...

     

    허나 이 재킷은 아니다. 세월을 무시한 원단의 질감에 처음 놀랐지. 명품에서 맞춘 옷도 아니다. 게다가 그 흔한 보풀이나 재킷 앞판이 뜨는 현상이 없다...?(재킷을 접착식으로 만들면 시간이 흐르면서 어쩔 수 없이 주머니랑 재킷 앞 판이 울어버린다(비접착식이 비스포크임)) 혹시나 해서 안감을 보니 'M.yamaguchi'가 새겨져있다.

     

     

    꼭 '그 당시'의 일본 맞춤 옷들은 죄다 이니셜이 박혀있다
    매무새가 흐트러지지 않게 고정해주는 스트랩(?)

     

     

    '일본 맞춤 옷이구먼... 어차피 사이즈가 안 맞겠구나...'

     

     

    속는 셈 치고 입어봤는데 어깨와 팔, 품까지 제대로 떨어진다. 최근 가장 소름 돋는 순간. 게다가 뒷 트임(벤트)이 없어 라인이 더 잘 떨어진다. (대신 조금 불편하다) 특히 이런 더블 재킷은 요즘 남조선 기성품에서는 절대 구할 수 없는 디자인 아닌가. 단추 밑만 잠그는 방식 말이다. 현대 남성 복식의 대표 스웨거 윈저 공(영국 왕이었으나 사랑을 위해 왕을 포기한 남자)이 즐겼던 바로 그 디자인이다. (물론 윈저 공의 재킷과는 디테일한 요소들이 조금 다르긴 하다. 라펠 디자인이라든가...)

     

    앞으로 패션 이야기만 나오면 매번 우려먹을 그 남자 '윈저 공'

     

     

    '야마구치 상... 당신은 어떤 남자였습니까...!'

     

     

    총장만 나에게 조금 길어서 살짝 줄였다. (3만원) 아마 야마구치 상은 나와 모든 신체 스펙이 거의 비슷한데 키만 185cm 정도였던 게 아닌가 싶다. 안주머니엔 제작 년월(이것도 맞춤 옷이니까)도 있는데 63년이다. 1963년일리는 없고 쇼와(昭和) 63년이라면 1988년이다. 이게 맞을 것 같다. 야마구치 상이 1988년에 맞춘 옷을 32년이 지난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일까.

     

    제작 년도를 가늠할 수 있는 케어라벨

     

    여기까지 생각하니 야마구치 상 자체가 궁금해진다. M.야마구치라면... 미야기 야마구치? 모리시타 야마구치? 무라카와 야마구치? 모리 야마구치? 무엇이었을까. 버블 붕괴 직전, 장신(長身)에 걸맞는 이 멋진 더블 재킷을 소화하던 그는 어떤 남자였을까.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있을까. 이 멋진 옷이 헐값에 빈티지 도매상에 흘러간 사연은 무엇일까.

     

     

    총 5만원으로 좋은 옷을 얻은 탓에 오늘도 쓸 데 없는 생각으로 하루가 다 가는구나...

     

     

    사족 : 안주머니에 적힌 숫자 '9238'은 내 핸드폰 번호 뒷자리다. 조금 소름인 것.
    사족2 : 이 재킷의 브랜드 'SOGO'는 백화점이란다. 우리나라 현백 롯백처럼 치바, 히로시마, 요코하마 등에 지점이 있는 백화점인데 1988년 당시에는 이 백화점에서 맞춤도 했었나 보다. 참고가 안 되겠지만 참고로 '소고'는 1830년 오사카에서 '소고 이헤이'가 설립했다고 한다...

     

    '소고' 백화점의 로고. 그 당시엔 백화점에서 맞춤을 많이 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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